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새러토가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1777년 초, 런던의 영국 정부는 캐나다 방면 영국군을 챔플레인 호수를 거쳐 뉴저지 주로 진군시켜서 영국에 반항적인 뉴잉글랜드를 고립시키는 계획을 고안했다. 캐나다 총독 가이 칼튼 경은 1775년 대륙군이 캐나다를 침공했을 때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적이 있었기에 이번 임무에 적합한 인사로 여겨졌지만, 북미 식민지 문제 전쟁장관 [[조지 사크빌]]은 칼튼 경의 부관 존 버고인 소장을 캐나다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후 다수의 영국 및 브라운슈바이크 연대가 캐나다로 파견되어 현지에 주둔한 영국군과 합세해 공세를 개시할 준비를 갖추었다. 사크빌은 버고인 소장이 챔플레인 호수를 거쳐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한 뒤 허드슨 강을 거슬러 내려가길 바랐다. 버고인은 뉴욕에 주둔한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소장이 뉴욕에서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과 합세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사크빌은 단독으로 미국 독립 세력의 중심지인 필라델피아를 공략하겠다는 하우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하우에게 버고인과 가급적 협력하라고 당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지시하지 않았다. 결국 윌리엄 하우 소장은 버고인이 뉴저지 주로 공세를 개시할 때 그를 돕지 않고 뉴욕의 병력을 함선에 실어서 필라델피아로 남하해 버렸다. 버고인은 1777년 6월에 캐나다에서 출발했다. 그는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채플레인 호수에서 올버니로 향했고, 베리 세인트 리저 장군이 이끄는 분견대 2,000명을 모호크 계곡을 통해 남하하여 올버니에서 자신과 합세하게 했다. 이후 그는 7월 초 전쟁 초반 상실했던 티콘데로가 요새를 탈환했다. 그러나 대륙군이 나무를 베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이동이 지연되었고, 보급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다가 [[베닝턴 전투]]에서 대패해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한편 배리 세인트 리저 장군이 이끄는 분견대 2,000명은 모호크 고개를 지나가다가 [[스탠윅스 요새 공방전]]을 치렀다. 이에 니콜라스 허키머가 이끄는 뉴욕 민병대 800명이 스탠윅스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왔으나 8월 6일 [[오리스카니 전투]]에서 영국군의 매복에 걸려 패퇴하고 허키머는 전사했다. 하지만 그 사이 스탠윅스 요새 수비병들이 자신들을 포위하던 적 숙영지를 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베네딕트 아놀드]]가 자신의 병력이 실제보다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기만책을 쓰자, 여기에 넘어간 리저 장군은 캐나다로 퇴각했다. 이로 인해 존 버고인 장군은 아무런 증원 병력 없이 적지 한복판에 노출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렇듯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졌지만, 버고인은 공세를 계속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허드슨 강을 따라 남하하여 새러토가에 도착한 뒤 그곳에 상당한 요새를 구축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그의 군대는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식량이 매우 부족했고, 사방에서 영국군으로부터 자신들의 고장을 지키려는 민병대가 몰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7월 27일 버고인의 영국군과 함께 하고 있던 인디언들이 뉴저지 주 베드민스터에 거주하고 있던 30대의 평범한 주부 제인 멕클레아를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자 현지 주민들의 영국군에 대한 적대감이 증폭되었고[* 제인 멕클레아는 영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한 데이비드 존스의 약혼자였다. 이 때문에 영국에 충성하던 주민들은 제인 멕클레아 살인 사건 이후로 영국군에게 등을 돌렸다. 버고인 장군이 제인을 살해한 인디언들을 처벌했다면 그나마 사정이 나아졌겠지만, 그들을 처벌할 경우 다른 인디언들이 이탈할 지도 모른다는 장교들의 조언을 들은 버고인이 그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현지의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독립 세력은 "아름답고 깨끗한 숙녀를 참혹하게 죽인 영국군에게 복수하자."며 주민들을 선동해 민병대를 더 많이 끌어모았다. 이에 버고인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월 19일 베미스 고지의 허드슨 강 서쪽 둑에 주둔한 대륙군 진영으로 접근했다. 이리하여 미국 독립 전쟁의 판도를 결정적으로 뒤집은 새러토가 전투의 막이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